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서해웅
청량리역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첫차를 탔다. 나는 스마트폰을 열고 모바일도서관 앱을 실행했다. 시각장애인인 내게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기차를 타고 가며 책을 읽는것이다. 지금도 가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삶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정이 가기도 한다. 이제는 더이상 책을 읽기 위해 창가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 살실에 도리어 가슴 한 구석이 시리다.
책 목록을 넘기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제목에 잠깐 멈추었다. 천양희시인! 시집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척 번째 녹음파일을 열고 책을 듣기 시작했다. 여러 편의 수필과 함께 시인의 시들이 적혀 있었다. 시인이 시를 쓰기까지 어느 것에 가서 어떤 영감을 얻어 한 편의 시가 탄생했는지 차분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시인으 시 구절도 적어 놓았다.
그 중에더 나는 이 구절에 심장이 내려 앉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발레리의 시 한 줄이었다. 시인 자신도 생사의 경계에서 자신을 구원한 한 줄이라고 했다. 자식을 잃고 남편과도 이혼하고 나서 혼자가 되었을 때 죽을 곳을 찾아 강원도를 떠돌던 시인이 어느 밀밭 한 가운데서 떠올린 구절이었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미하게 밀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상상 속 밀밭을 유리창에 그려 보았다. 펼쳐진 밀밭을 보며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며 스스로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신인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후 그 시인은 사라지고 내가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차분한 음성은 내 귀를 울리고 밀밭을 지나온 바람은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 따뜻함과 포근함에 뺨을 타고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그 시간 속에 있는 동안에는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절망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그때 나 자신을 그 시간 속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만 있다면 그 시간이 조금은 견딜만 할 것이다. 말은 쉽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또 누군가는 미친 듯 일에 몰두하기도 하리라.
책을 듣는 동안 어느 새 기차는 묵호항에 도착해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정동진이었다. 나는 삶을 잠시 멈추듯 책을 덮고 책갈피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정동진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린 승객들은 모두들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나도 바다를 한 동안 바라보았다. 날씨가 흐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멀리 희미하게 수평선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바다는 그대로인데 나만 혼자 변해 버린 느낌이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시계박물관, 시간이야기를 찾았다. 이곳도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처음 찾았을 때는 2층 짜리 조그만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여덟 량짜리 폐기차를 개조하여 박물관으로 만들오 놓았다. 운좋게 박물관 관계자를 만나 지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작년에 기차를 구입하여 박물관을 만들고 작년까지는 그 이층 건물도 남아 있었는데 이제는 허물고 그 자리에 주차장을 만들었다고 했다. 변한 것은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위안이 되었다. 찬찬히 박물관을 둘러 보았따 깃털로 만든 시계에서부터 규슬이 굴러가는 시계까지 언제 보아도 참 신기한 시계들이 칸칸마다 전시되어 있었다. 왜 박물관 이름이 시계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 이야기냐고 물을까 하다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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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도 종착역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책도 마지막 장을 향해 넘어가고 있었다. 이야기 종반부에 한 러시아 시인의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브로드스키가 소비에트에서 재판을 받는 부분이었다. 당시 소비에트 재판부는 시인을 노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았고 그런 죄복으로 그를 러시아에서 추방해 버렸다. 참으로 충격이었다. ㅍ푸쉬틴을 나은 러시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시각장애인이면서 책읽는 것이나 할 줄 아는 내가 이 시절에 살았다면 절반은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을까? 아니, 더한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밤이 늦어서야 겨우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책을 덮으며 딱 한 구절이 머리에 남았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 대학 시절 이 시를 읽었을 땨만 해도 별다른 감응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곱씹어 보니 여렴풋이 의미가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이다. 실상 바람이 부는 것과 살아야 겠다는 결심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시인은 진정으로 살고 싳었던 것은 아닐까? ´바람이 분다´라는 구절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가능하지만 ´살아야 겠다´는 구절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