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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옵터 너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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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에서 감사로 (박수민)
4살, 남들보다 이르게 흐려진 나의 세상은 그때부터 작고 동그란 안경테 안에 한정되기 시작했다. 초고도 근시라는 진단과 함께 시작된 나의 시야는 안개처럼 빠르게 어두워져 갔고 안경알은 두꺼워만 갔는데 나는 내가 보는 세상이 얼마나 흐릿한지,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너무 어린 나이에 급격히 눈이 나빠지다 보니 짧게는 1개월 안팎, 길어도 2~3개월마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안과를 찾게 되었다. 처음에는 집 근처의 건양대학병원이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서울의 김안과병원을 소개받아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대전에 살았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어린 초등학생 두 명을 데리고 대전에서 서울까지 편도로만 세 시간이 넘는 거리를 몇 개월마다 꾸준히 오가셨다.
그 길을 지금의 나에게 혼자서라도 다시 가라고 하면 벅차다, 다리가 아프다 몸이 무겁다 불평할 텐데 어쩜 그 젊은 나이의 어머니는 양손에 어린아이 둘을 잡고 불평 한 마디 없이 다니셨을까. 그럼에도 참 철없기도 하지, 어린 나에게는 그 여정이 어쩐지 설레는 나들이로만 느껴졌었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나에게만 쏟아지는 관심과 애정, 하루 동안 보지 않아도 되는 공부거리들, 다양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동생과 소곤소곤 수다 떠는 시간, 일상을 벗어나 서울이라는 별천지로 향하는 여행길 같았던 시간들이 설레어 안과를 가기 일주일 전부터는 하루빨리 안과를 가는 날이었으면 하고 기다렸던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엉덩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일주일도 더 전부터 내 앞에만 시력에 좋다는 반찬들을 놓아주시며 매일매일 눈이 어떤지, 더 안 보이지는 않는지 초조해하시던 부모님의 애타는 눈빛을 몰라보았던 나의 무심함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김안과에서의 기억 중 가장 선명한 것은 추운 겨울날의 일이다. 대형 안과의 진료라는 건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어서 진료를 예약한 시간이 오후여도 이른 오전부터 병원에 도착해 갖가지 테스트를 거치고 다시 선생님의 진료까지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날도 아침 일찍 안과에 도착해서 필요한 검사를 마친 후 선생님의 진료를 기다리는데, 나와 동생이 하도 배고파 하니 어머니께서 김안과 옆의 아주 작은 포장마차에서 떡볶이와 어묵을 사주셨다. 사실 나에게는 20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그 기억이 마냥 즐거운 기억 중 하나였다! 어린 나에게 떡볶이란 최고로 맛있는 음식이었고, 어머니께서 바깥에서 떡볶이에 어묵까지 사주시는 일이 흔치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추운 날 어머니의 차갑게 질린 손, 그리고 나의 즐거움이 대비되어 마음이 아프다. 유난히 입이 짧기도 하시고 추위를 타시던 어머니께서는 그날도 하도 추워 배가 안 고프시다며 오뎅 국물 한 컵만 계속 들고 계셨던 기억이 있는데, 왜 나는 어머니께서 배가 안 고프시다는 말을 그대로만 생각했을까. 한참 먹성 좋던 두 초등학생이 허겁지겁 먹는 떡볶이 한 그릇을 바라만 보시며 국물로 배를 채우던,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또 내 눈이 나빠졌을까 어떨까 수많은 초조함이 오갔을 그 마음을 왜 나는 몰랐을까. 눈물처럼 따듯하고 짭짤했을 그 국물 한 모금에 어머니의 사랑이 온전히 담겨 있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극적으로 시력 저하가 멈추었다. 약간의 난시와 함께 왼쪽 -16, 오른쪽 -14 디옵터. 1년여간의 진료 후 더 이상 시력이 나빠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부모님의 기쁨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심지어 지금의 나는 3년 전 렌즈 삽입 시력교정술을 받고 1.0에 가까운 시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교정술 후 처음으로 안경 없이 눈을 떴는데도 또렷한 세상을 보았을 때의 그 놀라움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맞이한 선명한 아침, 그때 느낀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흑백 영화에서 컬러 영화로 넘어온 듯한 그 순간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뚜렷하게 보이게 된 것은 과거 내가 마음으로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다.
아버지께서는 직업 군인이셨다. 그 당시 우리 가정의 경제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을 위해서라면 각종 좋다는 병원에 가는 비용은 물론, 눈 체조, 드림렌즈 등의 의학 시술, 보약, 눈에 좋다는 음식들까지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 우리가 서울로 안과를 가는 날이면 새벽 일찍 버스를 타는 곳에 함께 오셔서 배웅해 주시고 본인도 이른 출근을 하시던 뒷모습이 생생하다.
또 대전에서 서울까지 세 시간씩 걸려 두 초등학생을 데리고 다니셨던 어머니의 부지런함.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간식거리부터 챙겨 먹일 보약들이 한가득이었던 가방의 무게. 진료를 보기까지 기다리는 몇 시간 내내 자꾸 뼈마디가 튀어나오게 붙잡으시던 초조한 두 손. 그때의 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으로 느낀다. 부모님의 희생이 지금 내 눈의 빛이 되어 지금의 나를 밝히고 있다.
이제 나는 어머니께서 나의 손을 잡고 안과 병원들을 찾아다니던 나이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상을 보는 게 단순히 두 눈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많은 것들, 가장 소중한 것들은 마음으로 보아야만 보이곤 한다. 어릴 적 내게 가장 흐렸던 것은 단순히 떨어지는 디옵터가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을 보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오늘도 나의 하루는 반짝이는 세상 속에서 활기차고 행복하다. 그리고 이는 평생을 나를 위해 애써 주신 부모님과 김안과를 비롯한 많은 의료진들 덕분이다. 그들의 노고와 사랑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마음으로 보게 된 세상은 때로는 아픔도 있지만 놀라울 만큼 많은 감사함으로 가득하다. 나의 삶에 근시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사랑을 볼 수 있는 마음, 그리고 그 이상으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시야이다.
앞으로도 나는 이 선명해진 시야로 그리고 더욱 선명해진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기를 누군가의 세상을 밝혀주는 빛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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